강소성 남경시 백하구 마로가 복성신촌 8호 1946년 5월 경 중경에서 남경으로 이전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이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임시정부의 잔무처리와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귀국문제 등 제반문제의 처리를 중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조직한 기구였다. 주화대표단은 1945년 11월 1일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1947년 1월 1일 한국주화대표단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48년 8월 10일 해산하였다. 주화대표단의 단장에는 박찬익이, 대표에는 민필호와 지청천 두 명이 임명되었다. 주화대표단은 처음 설치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경 연화지 청사를 본부 사무소로 사용하였으나, 중국 국민정부가 1946년 5월경 ..
남경시 한구로 22번지 일본군이 남경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을 전시해 놓은 장소 금릉대학(金陵大學)의 전신은 1888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회문서원(匯文書院)이었다. 1910년 회문서원과 기독(基督)․익지(益智)서원을 통합하여 건립한 굉육서원(宏育書院)이 병합하여 금릉대학을 정식으로 창립하였다. 당시 명칭은 금릉대학당(金陵大學堂)이었고, 1915년 금릉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1952년 남경대학에 합병되었다. 금릉대학은 한국독립운동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부터 한인유학생이 이곳에 입학했고, 이중 다수가 한국독립운동사에 투신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여운형, 선우훈, 서병호, 백남칠, 조동호, 현창운, 김마리아 등이었고, 이들은 대체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
강소성 남경시 일본군이 남경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을 전시해 놓은 장소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국민정부(國民政府)의 수도였던 남경을 점령한 뒤 이듬해 2월까지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른 사건을 가리키며, 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 일본에서는 ‘난징사건(南京事件)’이라고 한다. 정확한 피해자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약 6주 동안 일본군에게 2~30만 명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되었으며,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2~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1946년에 도쿄(東京)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규모를 15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하지만 난징대학살 당시 국제적십자사·세계홍만자회(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