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선생 거주지 위치 중경시 기강구 타만 87호 대 한민국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에 이동녕선생이 거주했던 집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 이동녕이 거주했던 집이다. 경사진 면에 지어진 1층 벽돌건물이다. 좌우 2채로 보이지만, 사실상 한 동의 건물이며, 정면에서 볼 때 좌측 앞쪽 방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이동녕은 1939년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으로 선출된 후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과로가 겹쳐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기강 임정청사에서 영면하였다. 건물은 입구의 한 칸이 없어지거나 덧붙여지는 등 다소 변화한..
토교한인촌기념비 위치 : 중경시 파남구 화계촌 역사적의의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 한국광복군 산하 토교대 대원들이 거주했던 곳 해설 : 1940년 8월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은 토교 동감 폭포 위에 큰 기와집 3채를 짓고 살았으며, 길가의 2층 기와집을 사서 100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1채만 남아 있고 도로공사로 폭포도 자취를 감추었다. 임정이 중경으로 옮겨온 뒤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원의 원조를 받아 토교에 15년 기한으로 5천원을 내고 2천 여평의 땅을 사서 그 가족들을 이곳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이들을 훈련해 일종의 보충대인 토교대를 조직하였는데, 현 한교기독교청년회관 구내에 한국광복군 훈련병들의 ..
중경시 파남구 화계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 한국광복군 산하 토교대 대원들이 거주했던 곳 1940년 8월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은 토교 동감 폭포 위에 큰 기와집 3채를 짓고 살았으며, 길가의 2층 기와집을 사서 100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1채만 남아 있고 도로공사로 폭포도 자취를 감추었다. 임정이 중경으로 옮겨온 뒤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원의 원조를 받아 토교에 15년 기한으로 5천원을 내고 2천 여평의 땅을 사서 그 가족들을 이곳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이들을 훈련해 일종의 보충대인 토교대를 조직하였는데, 현 한교기독교청년회관 구내에 한국광복군 훈련병들의 숙소 및 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머물렀다고..
중경시 기강구 기강에 있는 박물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상이 별도로 전시되고 있다. 기강박물관은 건물면적이 3,000평방미터로, 1층은 관리부서, 2층은 기강국가지질공원전시관, 3층은 기강역사문과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은 기강의 우수한 자연유산 및 역사를 전시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별도로 전시하고 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의 활동상과 이동 경로 등이 전시돼 있어 치장에서 대한민국 임정이 가지는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湖南省 长沙市 开福区 西园北里 2号 호남성 장사시 개복구 서원북리 2호 (통태가 파출소 관할) 湖南省 長沙市 开福區 西園北里 6號 (장사시 서원북리 6호 위도와 경도는 나오지만 책과 맞지 않고 구글맵과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장사長沙에 머물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청사(1937년 11월~1938년 7월)로 사용했던 곳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약 5개월 후인 12월 13일에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이던 남경南京이 함락되었다. 임시정부는 11월 말 남경을 빠져나와 장사로 이동하여 1938년 7월까지 머물렀다가 다시 광주光州로 이동하였다. 당시 임시정부 청사는 서원북리 6호西園北里 6號에 자리하였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광복군 신순호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
절강성 항주시 학사로 32호 근처 한국독립당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따라 항주로 이동하여 사무실로 사용했던 곳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독립운동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3년 말까지는 상해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로 이동함에 따라 1934년 1월 항주로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기관지로 《진광》을 발행하는 한편 ‘항주구회’와 ‘항주특구회’ 등의 지부를 설치하고, 간부진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일제 측 정보 문서상에는 한국독립당의 항주 사무소 주소가 세 군데로 나타나 있다. 학사로 사흠방 34호, 40호, 41호가 그것이다. 2002년 4월 현지 조사 시 확인된 바에 따르면 학사로 사흠방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구지기념관 절강성 항주시 상성구 장생로 55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에서 머물던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투탄의거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가흥을 거쳐 절강으로 들어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항주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군무장 김철이 머물던 청태 제2여사를 청사로 사용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을 청사로 사용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일제측 자료를 통해 1935년 11월까지 사용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항주시 정부는 2002년 호변촌 23호의 청사 건물의 복원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청사 복원을 위해 한국 독립기념..
절강성 가흥시 일휘교 17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에서 활동할 때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잠시 피난 생활을 하던 곳 한국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주지는 가흥시 일휘교(日暉橋) 17호에 위치해 있다.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투탄의거 직후 김구는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이동녕ㆍ박찬익ㆍ엄항섭ㆍ김의한 등과 그 가족들도 가흥으로 피신하여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일휘교 17번지는 김구가 피신하여 있던 매만가 76번지와 약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일휘교 17호 건물은 청조 말년에 나무와 벽돌로 만들어졌다. 2층 건물로 네 칸의 방과 마당이 있다. 총 부지 면적은 904㎡이며, 전시 면적은 332.5㎡이다. 1995년 가흥시가 자체적으로 보수 공사를 진행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사진 및 당시 사용했던..
상해시 황포구 마당로 306롱 3-5호 임시정부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사용했던 마지막 청사 건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수립된 후 만 13년 동안 상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청사를 두고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장소나 청사의 위치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신부로에서 제1회 의정원 회의가 개최된 후 수립되었지만, 이곳이 청사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도 한 두 곳이 아니었다. 여러 곳을 옮겨 다녔는데 현재 확인된 횟수만 해도 열 두 차례 이상이라고 한다. 임정 수립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청사 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등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1919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