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東海)와 둥베이[東北 : 옛 지명은 만주] 지구 사이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연해주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 극동 지방의 지구들 가운데 가장 작으며, 최남쪽에 있다. 1926년 원래 소비에트 극동 공화국이었던 지역이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프리모르스키 지구가 되었다. 최고높이가 1,855m에 이르는 시호테알린 산맥이 해안선과 나란히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이 지구의 주요강인 우수리 강(아무르 강의 지류)은 러시아 연방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북쪽으로 흐른다. 연안 평야는 좁고 항구도 거의 없으며, 짧고 물살이 빠른 작은 강이 몇 개 흐를 뿐이다. 남쪽에 있는 페트라베리코고 만(표트르 대제 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천연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항구..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Уссурийск в окрестности села Утёсное, у реки Раздольная. 연해주 우수리스크 우쪼스노예 마을 주변, 라즈돌리노예강 옆 1906년 북간도 독립운동 근거지 독립운동계의 대표적인 지도자 이상설은 1906년 북간도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용정에 서전서숙을 개숙한 뒤 이듬해 7월 헤이그특사의 정사가 되어 구국 외교에 헌신하였으며,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한 뒤로는 십삼도의군 창설과 성명회 결성, 그리고 권업회 활동 등을 지도했던 독립운동계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이동녕선생 거주지 위치 중경시 기강구 타만 87호 대 한민국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에 이동녕선생이 거주했던 집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 이동녕이 거주했던 집이다. 경사진 면에 지어진 1층 벽돌건물이다. 좌우 2채로 보이지만, 사실상 한 동의 건물이며, 정면에서 볼 때 좌측 앞쪽 방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이동녕은 1939년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으로 선출된 후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과로가 겹쳐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기강 임정청사에서 영면하였다. 건물은 입구의 한 칸이 없어지거나 덧붙여지는 등 다소 변화한..
중경시 기강구 타만 87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에 이동녕선생이 거주했던 집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 이동녕이 거주했던 집이다. 경사진 면에 지어진 1층 벽돌건물이다. 좌우 2채로 보이지만, 사실상 한 동의 건물이며, 정면에서 볼 때 좌측 앞쪽 방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현재 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동녕은 1939년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으로 선출된 후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과로가 겹쳐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기강 임정청사에서 영면하였다. 건물은 입구의 한 칸이 없어지거나 덧붙여지는 등 다소 ..
중경시 기강구 기강에 있는 박물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상이 별도로 전시되고 있다. 기강박물관은 건물면적이 3,000평방미터로, 1층은 관리부서, 2층은 기강국가지질공원전시관, 3층은 기강역사문과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은 기강의 우수한 자연유산 및 역사를 전시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별도로 전시하고 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의 활동상과 이동 경로 등이 전시돼 있어 치장에서 대한민국 임정이 가지는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호남성 장사시 개복구 연승가 남목청향 6호 지청천池靑天이 당수로 있었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구지에 만들어진 전시관 1938년 초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당이 본부로 사용했던 곳이자 임시정부요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했던 장소이다. 또한, 1938년 5월 7일 김구 선생이 3당 통합회의 도중 피격당한 ‘남목청 사건’으로 유명한 장소이기도 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독립운동진영에서는 이를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의 기회로 보았다. 우익진영에서는 독립을 위한 통합과 단결을 위한 협동전선운동을 통해서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과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의 합당이 그것이다. 3당의 합당은 김구의 한국 국민당이 중심이 되었다. 당..
남경시 한구로 22번지 일본군이 남경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을 전시해 놓은 장소 금릉대학(金陵大學)의 전신은 1888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회문서원(匯文書院)이었다. 1910년 회문서원과 기독(基督)․익지(益智)서원을 통합하여 건립한 굉육서원(宏育書院)이 병합하여 금릉대학을 정식으로 창립하였다. 당시 명칭은 금릉대학당(金陵大學堂)이었고, 1915년 금릉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1952년 남경대학에 합병되었다. 금릉대학은 한국독립운동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부터 한인유학생이 이곳에 입학했고, 이중 다수가 한국독립운동사에 투신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여운형, 선우훈, 서병호, 백남칠, 조동호, 현창운, 김마리아 등이었고, 이들은 대체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
절강성 항주시 상성구 판교로 오복리 이롱 2호 대한민국임시정부 호변촌 청사에 살았던 가족들이 1934년 11월에 오복리 2호 건물로 이주하여 거주했던 곳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상해를 떠나 항주에서 약 3년 6개월여 동안 머물렀다. 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청태 제2여사에 이어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두었다. 일제 측의 정보 문서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이 처음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함께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호변촌 청사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 1934년 11월 오복리 2가 2호로 이전하였다고 나와 있다. 현재는 2층의 목조식 건물로 왕씨 성을 가진 주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건물의 외관은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가족들은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구지기념관 절강성 항주시 상성구 장생로 55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에서 머물던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투탄의거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가흥을 거쳐 절강으로 들어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항주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군무장 김철이 머물던 청태 제2여사를 청사로 사용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을 청사로 사용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일제측 자료를 통해 1935년 11월까지 사용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항주시 정부는 2002년 호변촌 23호의 청사 건물의 복원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청사 복원을 위해 한국 독립기념..
윤봉길의사가 1932년 4월 29일 폭탄을 던져 일제의 군부와 정관계 수뇌부를 처단했던 곳 위치 : 상해시 홍구구 사천북로 2288호(노신공원 내)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이 일제가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승리축하식을 거행하는 것을 이용하여 일제의 군부와 정관계 수뇌부 7명을 처단하는 의거를 일으킨 곳이다. 윤봉길은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기념식장에 잠입한 후 식장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오전 11시 미리 준비해 온 도시락 폭탄을 일본군 수뇌부가 있던 연단을 향해 투척하였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연기와 함께 천지를 진동시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폭탄의 파편에 맞은 시라카와(白川) 대장은 5월 26일 사망했으며, 같은 자리에 있던 다수의 일본군 수뇌부들이 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