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역사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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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東海)와 둥베이[東北 : 옛 지명은 만주] 지구 사이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연해주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 극동 지방의 지구들 가운데

가장 작으며, 최남쪽에 있다.

 

1926년 원래 소비에트 극동 공화국이었던 지역이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프리모르스키

지구가 되었다.

 

최고높이가 1,855m에 이르는 시호테알린 산맥이 해안선과 나란히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이 지구의 주요강인 우수리 강(아무르 강의 지류)은 러시아 연방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북쪽으로 흐른다.

연안 평야는 좁고 항구도 거의 없으며, 짧고 물살이 빠른 작은 강이 몇 개 흐를 뿐이다. 

남쪽에 있는 페트라베리코고 만(표트르 대제 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천연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항구로 꼽힌다.

이 만의 후미인 졸로토이로크('황금뿔'이라는 뜻) 만 연안의 반도에는 이 지구의 행정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아권 러시아의 주요항구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태평양 연안 종착지이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 인들이었다. 5~6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나나이, 우데게, 에벤키 같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아직도 연해주와 아무르 주에 거주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는 발해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발해는 연해주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며, 만주와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였던 고구려의 후예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중세봉건국가로, 농업, 목축 등의 산업과 함께 고유의 전통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발해는 당, 일본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

 

1115년부터 1234년까지 극동 러시아의 남쪽 부분은 보다 강력한 제국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였다.

여진족은 퉁구스계의 민족이다. 유목과 농업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금나라는 또한 야금, 조선(造船) 등의 산업이 있었다.

금나라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송, 고려,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중국을 점령한 금나라는 꽤 강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금나라는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300년 이상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독특한 동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과 만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만주족(금나라 여진족의 후신)이 17세기 초 중국 대륙을 정벌하고 청나라를 건설하면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17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헤이룽 강(黑龍江, 아무르 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였다.(청-러시아 국경 분쟁) 1689년에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정하고, 연해주는 계속 청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으로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러시아 제국은 남진하여 1858년 하바로프스크를 건설하였다.

 

 

니콜라이 무라피요프-아무르스키 백작에게 있어서 러시아가 해안지방을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는 1858년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의 이북 지역을, 1860년에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1910년 이전에 의병으로 시작되었다.

연해주의 의병은 크게 두 계통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연해주의 이주 한인 사회에서 조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연해주로 건너온 것이다.

연해주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조직한 이는 간도관리사 이범윤이었다.

 

그는 1902년 간도시찰원, 1903년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의 한인 보호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은 함경도 일대의 산포수를 중심으로 조직한 충의대를 이끌고 함경도 지역에서 항일전을 벌이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11월에는 충의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훈춘에 잠시 머물다가, 1906년 초 연해주 연추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최재형의 도움을 얻어 의병을 조직했다.

 

한편 1908년에는 국내의 저명한 의병장 유인석도 이곳으로 망명해왔다. 유인석은 연해주에서 여러 세력을 모아 1910년에 의병 세력의

통합체인 십삼도의군을 결성하고, 자신이 도총재를 맡았다. 연해주 의병들은 국내 진공 작전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의병부대를 이끌던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에는 연추 하리마을에서 김기룡 · 황병길 등 11명과 함께 ‘조국 독립 회복과 동양 평화

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함께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선혈로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안중근은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성대신 코코프제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 전우였던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갔다.

 

안중근와 우덕순은 10월 21일 하얼빈에 도착해 거사를 준비했다.

 

우덕순과 하얼빈에서 합류한 조도선은 채가 구역에서 기회를 보기로 했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기회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우덕순과 조도선은 기회를 얻지 못했고, 하얼빈역에서 기다리던 안중근은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는 틈을

타 세 발의 탄환으로 이토를 거꾸러뜨렸다.

 

얼마 뒤인 1910 8 연해주의 한인들은 외신을 통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것이라는 뉴스를 들었다.

 

이에 그들은 8 23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聲明會) 조직했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이런 정세에 대응하여 독립운동단체 대신 한인 사회의 자치단체를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역량을 결집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권업회였다.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따라 반제국주의 반봉건 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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