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시 소양로2가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5.5m. 보물 제77호. 기단이 광대함에 비하여 탑신부가 작으나, 탑신을 높여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한 것이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0 현주소 : 하바롭스크 크라이 인 0 현재상태 : 인(In) 정거장 역사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정거장 역사 오른쪽에 인정거장 전투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0 관련사항 : 1921년 12월 25-26일이후 인정거장 전투 현장 0 내용 - 러시아인민혁명군과 한인빨찌산간의 연합군대가 1921년 12월 25-26일부터 3,4일동안 백위파군과 인정거장을 둘러싸고 치룬 전투. 실제 사격을 교환한 시간만 12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였다. 백위파는 천여명의 전사자를 냈고, 혁명군측은 전사 75명 부상 17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이용을 사령관으로 하는 한인빨찌산(고려의용군) 2개 중대는 1922년 2월 5일 러시아군 2개중대와 함께 인정거장과 볼로차예프카 사이에 위치해 있는 백위파의 제3소..
1085년 중국 송나라로 구법을 온 고려 의천 스님이 14개월간 머물렀던 사찰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й, село Волочаевка, высота Июнь-Корань. 하바로브스크주 하바로브스크 보로차예프카 마을 뒤 이윤코란 1922년 2월 볼로차예프카 전투 현장에서 희생된 빨치산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 1922년 2월 볼로차예프카 전투 현장에서 희생된 빨치산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볼로차예프카 전투는 러시아혁명군이 하바로브스크를 해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전투다. 비문에는 ‘118명의 빨치산이 잠들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2년 2월 10일 볼로차예프카 전투에 참전한 고려혁명의용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2월 11일 전투에서 승리하여 2월 14일 하바로프스크에 입성하였다. 이 전투에 참전한 한인들은 러시아 붉은 군대의 승리가 바로 조국의 독립과..
Хабаровск, станция Краин. 하바로브스크주 하바로브스크 크라이 인역 1921년 12월 25일~26일 인(In) 정거장 전투가 일어났던 곳 1921년 12월 25일~26일 인(In) 정거장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인(In) 정거장 전투는 러시아 인민혁명군과 한인빨치산간의 연합군대가 1921년 12월 25~26일부터 3~4일동안 백위파군과 인정거장을 둘러싸고 치른 전투이다. 실제 사격을 교환한 시간만 12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였다. 백위파는 천여 명의 전사자를 냈고, 혁명군 측은 전사 75명, 부상 17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이용을 사령관으로 하는 한인빨치산(고려의용군) 2개 중대는 1922년 2월 5일 러시아군 2개 중대와 함께 인정거장과 볼로차예프카 사이에 있는 백..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에서 사용했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청사 雙重喜慶(경사가 겹친다)"는 의미에서 도시의 명칭이 유래된 중경은 사천분지의 동남부에 있으며, 장강(長江)과 가릉강(嘉陵江)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중국 서남지구의 중요한 공업기지이다. 1997년 8월에 전국 4대 직할시 중의 한 곳으로 지정되었다. 역사가 오래되고 고대 파국의 도읍지였던 중경은 교외에 자연 풍경지와 역사적 명소가 매우 많다. 또한 삼협 수상 운수선의 시발점이며 수많은 삼협 유람선의 시발 및 종착 항구로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연평균 기온이 18℃이며,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이 7℃로 춥지 않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중경으로 옮겨온 뒤 입주했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청사이다. 대한민..
중경시 파남구 화계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 한국광복군 산하 토교대 대원들이 거주했던 곳 1940년 8월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은 토교 동감 폭포 위에 큰 기와집 3채를 짓고 살았으며, 길가의 2층 기와집을 사서 100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1채만 남아 있고 도로공사로 폭포도 자취를 감추었다. 임정이 중경으로 옮겨온 뒤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원의 원조를 받아 토교에 15년 기한으로 5천원을 내고 2천 여평의 땅을 사서 그 가족들을 이곳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이들을 훈련해 일종의 보충대인 토교대를 조직하였는데, 현 한교기독교청년회관 구내에 한국광복군 훈련병들의 숙소 및 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머물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