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성 장사시 개복구 연승가 남목청향 6호 지청천池靑天이 당수로 있었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구지에 만들어진 전시관 1938년 초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당이 본부로 사용했던 곳이자 임시정부요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했던 장소이다. 또한, 1938년 5월 7일 김구 선생이 3당 통합회의 도중 피격당한 ‘남목청 사건’으로 유명한 장소이기도 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독립운동진영에서는 이를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의 기회로 보았다. 우익진영에서는 독립을 위한 통합과 단결을 위한 협동전선운동을 통해서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과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의 합당이 그것이다. 3당의 합당은 김구의 한국 국민당이 중심이 되었다. 당..
강소성 남경시 일본군이 세운 가장 규모가 큰 난징의 위안소로 여기서 생활한 조선인 위안부의 생존사실이 알려지면서 조명을 받음 이제항위안소는 면적이 6700㎡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 시멘트 담장과 가림막 너머 낡고 황량한 대형 건물 7동이 뉴스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여기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조선인 위안부의 생존 사실이 확인되면서였다. 그이가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다가 이제는 고인이 된 박영심(1921~2006) 할머니다. 평남 출신의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 난징의 위안소에 끌려와 긴스이루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강소성 남경시 백하구 마로가 복성신촌 8호 1946년 5월 경 중경에서 남경으로 이전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이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임시정부의 잔무처리와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귀국문제 등 제반문제의 처리를 중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조직한 기구였다. 주화대표단은 1945년 11월 1일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1947년 1월 1일 한국주화대표단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48년 8월 10일 해산하였다. 주화대표단의 단장에는 박찬익이, 대표에는 민필호와 지청천 두 명이 임명되었다. 주화대표단은 처음 설치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경 연화지 청사를 본부 사무소로 사용하였으나, 중국 국민정부가 1946년 5월경 ..
남경시 한구로 22번지 일본군이 남경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을 전시해 놓은 장소 금릉대학(金陵大學)의 전신은 1888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회문서원(匯文書院)이었다. 1910년 회문서원과 기독(基督)․익지(益智)서원을 통합하여 건립한 굉육서원(宏育書院)이 병합하여 금릉대학을 정식으로 창립하였다. 당시 명칭은 금릉대학당(金陵大學堂)이었고, 1915년 금릉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1952년 남경대학에 합병되었다. 금릉대학은 한국독립운동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부터 한인유학생이 이곳에 입학했고, 이중 다수가 한국독립운동사에 투신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여운형, 선우훈, 서병호, 백남칠, 조동호, 현창운, 김마리아 등이었고, 이들은 대체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
강소성 남경시 일본군이 남경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을 전시해 놓은 장소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국민정부(國民政府)의 수도였던 남경을 점령한 뒤 이듬해 2월까지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른 사건을 가리키며, 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 일본에서는 ‘난징사건(南京事件)’이라고 한다. 정확한 피해자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약 6주 동안 일본군에게 2~30만 명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되었으며,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2~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1946년에 도쿄(東京)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규모를 15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하지만 난징대학살 당시 국제적십자사·세계홍만자회(世界..
절강성 항주시 인화로 22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항주에 도착한 직후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투탄의거 직후 일제의 감시와 검거를 피해 상해를 떠나 항주에 도착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로 이전한 후 처음으로 사용한 청사가 청태 제2여사였다. 이곳 32호실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장 김철이 머물고 있었고, 임시 국무위원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인화로 22호로 지번이 바뀌었고, 청태 제2여사 자리에는 군영반점이 자리잡고 있다. 군영반점은 항주시 인민정부상업국 소속인 음식복무공사에 속한 국영여관 겸 음식점이다. 외부 모습은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지만, 안쪽에는 아직도 옛 모습이 남아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곳 청태 제2여사에서 잠시 머물다가 호변촌..
절강성 항주시 상성구 판교로 오복리 이롱 2호 대한민국임시정부 호변촌 청사에 살았던 가족들이 1934년 11월에 오복리 2호 건물로 이주하여 거주했던 곳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상해를 떠나 항주에서 약 3년 6개월여 동안 머물렀다. 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청태 제2여사에 이어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두었다. 일제 측의 정보 문서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이 처음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함께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호변촌 청사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 1934년 11월 오복리 2가 2호로 이전하였다고 나와 있다. 현재는 2층의 목조식 건물로 왕씨 성을 가진 주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건물의 외관은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가족들은 이 곳에서..
절강성 항주시 학사로 32호 근처 한국독립당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따라 항주로 이동하여 사무실로 사용했던 곳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독립운동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3년 말까지는 상해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로 이동함에 따라 1934년 1월 항주로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기관지로 《진광》을 발행하는 한편 ‘항주구회’와 ‘항주특구회’ 등의 지부를 설치하고, 간부진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일제 측 정보 문서상에는 한국독립당의 항주 사무소 주소가 세 군데로 나타나 있다. 학사로 사흠방 34호, 40호, 41호가 그것이다. 2002년 4월 현지 조사 시 확인된 바에 따르면 학사로 사흠방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구지기념관 절강성 항주시 상성구 장생로 55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에서 머물던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투탄의거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가흥을 거쳐 절강으로 들어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항주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군무장 김철이 머물던 청태 제2여사를 청사로 사용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을 청사로 사용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일제측 자료를 통해 1935년 11월까지 사용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항주시 정부는 2002년 호변촌 23호의 청사 건물의 복원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청사 복원을 위해 한국 독립기념..
중국 항주시 서호 1085년 중국 송나라로 구법을 온 고려 의천 스님이 14개월간 머물렀던 사찰 혜인고려사는 1085년 중국 송나라로 구법을 온 고려 의천 스님이 14개월간 머물렀던 사찰로 고려로 돌아간 의천 스님이 『화엄경』과 황금 2천냥을 시주해 중창한 후 사찰이름까지도 고려사로 바뀌었다. 혜인고려사는 5대 오월(吳越) 국왕 전류가 세웠으며, 원래 이름은 혜인선원이었다. 북송시기 고려왕자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구법을 위해 머물렀고, 정원법사와 대론이후 다시 고려에 귀국하여 혜인선원 중창 복원비를 보내 황금으로 절을 증축하였고, 함께 보낸 화엄경을 모심으로써 이름을 교원으로 바꾸었으며 사람들은 그때부터 고려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2007년 5월 1일에 복원된 혜인고려사는 세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