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l. Turgeneva, 24, Khabarovsk, Khabarovskiy kray. 하바롭스크 투르제네프 거리 명예광장 2차 세계대전 승리 30주년을 기념(1985년) 하바롭스크에서 지대가 가장 높은 곳으로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승리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85년 조성된 곳으로 광장 중앙에는 30m 높이의 대형 기념비와 반원형의 대리석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 한가운데는 당시 사망한 32,662명의 극동군의 명부가 빼곡히 새겨져 있고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면 초병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비에는 소련영웅, 노력영웅, 영예훈장 등을 수여받은 하바롭스크인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다. 광장에는 희생자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영원의 불)이 타오르고 있고, 최근 아프카니스탄 전쟁에..
ul. Turgeneva, 24, Khabarovsk, Khabarovskiy kray. 하바롭스크 투르제네프 거리 명예광장 하바롭스크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 영광의 광장에 있는 하바롭스크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으로써 트랜스피구레이션 성당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말로는 성모영면성당이라고 한다. 아무르 강변에 2001년 러시아 정교회의 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인 알렉산드르 2세의 축복과 함께 그리스 정교 사원의 첫 돌이 세워졌다. 슬라브 광장에 구원 프레오브라젠스키 교회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이사키에프스키와 모스크바의 성 구세주 사원 다음으로, 러시아 정교 교회들 중 세 번째로 큰 사원이다. 땅에서 금색 돔까지의 높이는 제단 측면에서 95m이니다 상단의 홀은 약 2000여명이 수용 가능하며, 하단은..
Выезжаем из центра по улице Муравьёва-Амурского, затем по улице Промышленная, у дороги справа овраг. 하바로브스크주 하바로브스크 시내를 빠져나가 무라비예프-아무르스카야 거리를 따라 하바로브스크 공장으로 향하여가다 프로뮈쉴렌나야 거리를 지난 후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계곡 한인사회당 창건자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가 처형된 곳 한인사회당 창건자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가 처형된 곳이다. 1918~1920년 시베리아 내전 당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백위파와 외국 간섭 군에 의하여 처형되었던 곳으로 러시아 사람들은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알렉산드라의 본명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스탄케비치)으로 아버지는..
동해(東海)와 둥베이[東北 : 옛 지명은 만주] 지구 사이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연해주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 극동 지방의 지구들 가운데 가장 작으며, 최남쪽에 있다. 1926년 원래 소비에트 극동 공화국이었던 지역이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프리모르스키 지구가 되었다. 최고높이가 1,855m에 이르는 시호테알린 산맥이 해안선과 나란히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이 지구의 주요강인 우수리 강(아무르 강의 지류)은 러시아 연방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북쪽으로 흐른다. 연안 평야는 좁고 항구도 거의 없으며, 짧고 물살이 빠른 작은 강이 몇 개 흐를 뿐이다. 남쪽에 있는 페트라베리코고 만(표트르 대제 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천연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항구..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й, село Волочаевка, высота Июнь-Корань. 하바로브스크주 하바로브스크 보로차예프카 마을 뒤 이윤코란 1922년 2월 볼로차예프카 전투 현장에서 희생된 빨치산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 1922년 2월 볼로차예프카 전투 현장에서 희생된 빨치산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볼로차예프카 전투는 러시아혁명군이 하바로브스크를 해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전투다. 비문에는 ‘118명의 빨치산이 잠들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2년 2월 10일 볼로차예프카 전투에 참전한 고려혁명의용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2월 11일 전투에서 승리하여 2월 14일 하바로프스크에 입성하였다. 이 전투에 참전한 한인들은 러시아 붉은 군대의 승리가 바로 조국의 독립과..
Хабаровск, станция Краин. 하바로브스크주 하바로브스크 크라이 인역 1921년 12월 25일~26일 인(In) 정거장 전투가 일어났던 곳 1921년 12월 25일~26일 인(In) 정거장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인(In) 정거장 전투는 러시아 인민혁명군과 한인빨치산간의 연합군대가 1921년 12월 25~26일부터 3~4일동안 백위파군과 인정거장을 둘러싸고 치른 전투이다. 실제 사격을 교환한 시간만 12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였다. 백위파는 천여 명의 전사자를 냈고, 혁명군 측은 전사 75명, 부상 17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이용을 사령관으로 하는 한인빨치산(고려의용군) 2개 중대는 1922년 2월 5일 러시아군 2개 중대와 함께 인정거장과 볼로차예프카 사이에 있는 백..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에서 사용했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청사 雙重喜慶(경사가 겹친다)"는 의미에서 도시의 명칭이 유래된 중경은 사천분지의 동남부에 있으며, 장강(長江)과 가릉강(嘉陵江)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중국 서남지구의 중요한 공업기지이다. 1997년 8월에 전국 4대 직할시 중의 한 곳으로 지정되었다. 역사가 오래되고 고대 파국의 도읍지였던 중경은 교외에 자연 풍경지와 역사적 명소가 매우 많다. 또한 삼협 수상 운수선의 시발점이며 수많은 삼협 유람선의 시발 및 종착 항구로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연평균 기온이 18℃이며,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이 7℃로 춥지 않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중경으로 옮겨온 뒤 입주했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청사이다. 대한민..
중경시 파남구 화계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 한국광복군 산하 토교대 대원들이 거주했던 곳 1940년 8월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은 토교 동감 폭포 위에 큰 기와집 3채를 짓고 살았으며, 길가의 2층 기와집을 사서 100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1채만 남아 있고 도로공사로 폭포도 자취를 감추었다. 임정이 중경으로 옮겨온 뒤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원의 원조를 받아 토교에 15년 기한으로 5천원을 내고 2천 여평의 땅을 사서 그 가족들을 이곳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이들을 훈련해 일종의 보충대인 토교대를 조직하였는데, 현 한교기독교청년회관 구내에 한국광복군 훈련병들의 숙소 및 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머물렀다고..
중경시 기강구 타만 87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에 이동녕선생이 거주했던 집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 이동녕이 거주했던 집이다. 경사진 면에 지어진 1층 벽돌건물이다. 좌우 2채로 보이지만, 사실상 한 동의 건물이며, 정면에서 볼 때 좌측 앞쪽 방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현재 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동녕은 1939년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으로 선출된 후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과로가 겹쳐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기강 임정청사에서 영면하였다. 건물은 입구의 한 칸이 없어지거나 덧붙여지는 등 다소 ..
중경시 기강구 기강에 있는 박물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상이 별도로 전시되고 있다. 기강박물관은 건물면적이 3,000평방미터로, 1층은 관리부서, 2층은 기강국가지질공원전시관, 3층은 기강역사문과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은 기강의 우수한 자연유산 및 역사를 전시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별도로 전시하고 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의 활동상과 이동 경로 등이 전시돼 있어 치장에서 대한민국 임정이 가지는 위치를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