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성 광주시 장주도 황포 손문이 당시 일본군에게 대항할 군사를 키우던 곳. 김구, 장개석 등이 이곳을 졸업하고 교사도 역임하였다. 또한 송가황조의 배경 및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1924년 6월 6일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인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설립되었다. 황포군관학교는 소련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설립한 소련식 사관학교이며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 육군 군관학교이지만 주강珠江의 황포 장주도에 위치해서 일반적으로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린다. 장개석이 황포군교에서 피압박민족 후원으로 조선인 학생을 급비생으로 대우하자 입학지망생이 증가했다. 조선인들은 피압박민족으로서 신식군관학교인 황포군교에서 중국의 새로운 정치와 군사를 배우고자 운집했다. 입학기가 매 8개월에 1회였지만 학교 당국과 협의해서 조선인에 ..
광동성 광주시 월수구 해방북로 988호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孫文)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931년 건축 광저우 시 최대 규모의 공원으로 공원 안에 월수산이 있어 월수공원이라 불린다. 93만㎡의 넓은 부지에 모두 3개의 인공 연못과 7개의 산이 있으며 녹음이 풍부한 산과 연못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중세까지 명승지로서 누각 등 많은 건물이 세워진 곳이다. 손문의 제안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에 공원이 되었다. 공원 내에는 우양 석상을 비롯해 광저우 박물관, 중산기념비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시민들은 물론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11m 높이의, 거대한 다섯 마리 양이 멋지게 조각되어 있는 우양 석상(五羊石像)은 1959년에 만들어졌으며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
광주시 중산3로 광주기의열사릉원 내 광동성 역사 중심기관으로서 현재 광주근대사박물관, 황포군관학교유적지기념관, 광주봉기기념관 등 광동성 지역 주요 6개 기념관․] 박물관을 함께 관리 광주기의열사능원 안에는 옛날 광동자의국으로 사용되었던 광동혁명역사박물관이 있다. 광동혁명역사박물관은 1959년 개관하였고, 광저우시문화국 소속 기관으로 광저우시 중산 3로 혁명열사릉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광동혁명역사박물관은 광동성 역사 중심기관으로서 현재 광주근대사박물관, 황포군관학교유적지기념관, 광주봉기기념관 등 광동성 지역 주요 6개 기념관․박물관을 함께 관리하고 있다. 광동혁명역사박물관은 아편전쟁(1840년)부터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시까지의 주요 사건․인물․유물 등의 역사를 연구․전시하고 있다. 중국 1급 ..
湖南省 長沙市 芙蓉區 湖南農業大學 2013년 유자명柳子明이 근무한 호남대학 제2교학관과 제3교학관 사이의 공터에 세운 동상 유자명은 1922년 재차 중국에 망명한 이후 신채호, 이회영 등 급진적 경향의 혁명사들과 긴밀히 교류하였으며, 이들은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정부라는 조직 형태보다 아나키즘의 연합조직을 선호하였다. 창립 당시 이회영李會榮·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백정기白貞基·유자명 등 6명이 참석하였다.유자명은 동경제국대학에서 아나키즘의 이론을 접하고 크로폿킨의 저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크로폿킨의 “호상 부조론 互相扶助 論”(Mutual Aid)의 영향이 컸다. 그는 호상 부조론을 다윈의 진화론과 비교하면서 생물진화의 원인이 ..
광주시 중산3로 광주기의열사릉원 1927년 12월, 광저우에서 혁명파들이 봉기했을 때 약 5,000여 명이 희생되었는데, 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 1927년 12월 광주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의 혁명열사들 무덤이 있는 곳이다. 광주봉기는 중국 국공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점이 되었다. 국공합작을 지지했던 손문이 사망하자 후계자인 장개석은 손문의 뜻과는 반대로 공산당에 공격을 감행했다. 1927년 4월 상해에서 장개석은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에 대한 대대적인 공작과 살해는 지시하였다. 이로써 1차 국공합작은 완전히 깨졌고, 공산당은 탄압을 피해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열사능원의 기념탑에는 광주 봉기 당시의 진행과정이 부조되어 있다. 국공합작이 깨지자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자연맹)은 중국 전역의 혁명보..
湖南省 长沙市 开福区 西园北里 2号 호남성 장사시 개복구 서원북리 2호 (통태가 파출소 관할) 湖南省 長沙市 开福區 西園北里 6號 (장사시 서원북리 6호 위도와 경도는 나오지만 책과 맞지 않고 구글맵과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장사長沙에 머물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청사(1937년 11월~1938년 7월)로 사용했던 곳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약 5개월 후인 12월 13일에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이던 남경南京이 함락되었다. 임시정부는 11월 말 남경을 빠져나와 장사로 이동하여 1938년 7월까지 머물렀다가 다시 광주光州로 이동하였다. 당시 임시정부 청사는 서원북리 6호西園北里 6號에 자리하였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광복군 신순호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
호남성 장사시 개복구 연승가 남목청향 6호 지청천池靑天이 당수로 있었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구지에 만들어진 전시관 1938년 초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당이 본부로 사용했던 곳이자 임시정부요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했던 장소이다. 또한, 1938년 5월 7일 김구 선생이 3당 통합회의 도중 피격당한 ‘남목청 사건’으로 유명한 장소이기도 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독립운동진영에서는 이를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의 기회로 보았다. 우익진영에서는 독립을 위한 통합과 단결을 위한 협동전선운동을 통해서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과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의 합당이 그것이다. 3당의 합당은 김구의 한국 국민당이 중심이 되었다. 당..
강소성 남경시 일본군이 세운 가장 규모가 큰 난징의 위안소로 여기서 생활한 조선인 위안부의 생존사실이 알려지면서 조명을 받음 이제항위안소는 면적이 6700㎡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 시멘트 담장과 가림막 너머 낡고 황량한 대형 건물 7동이 뉴스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여기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조선인 위안부의 생존 사실이 확인되면서였다. 그이가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다가 이제는 고인이 된 박영심(1921~2006) 할머니다. 평남 출신의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 난징의 위안소에 끌려와 긴스이루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강소성 남경시 백하구 마로가 복성신촌 8호 1946년 5월 경 중경에서 남경으로 이전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이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임시정부의 잔무처리와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귀국문제 등 제반문제의 처리를 중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조직한 기구였다. 주화대표단은 1945년 11월 1일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1947년 1월 1일 한국주화대표단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48년 8월 10일 해산하였다. 주화대표단의 단장에는 박찬익이, 대표에는 민필호와 지청천 두 명이 임명되었다. 주화대표단은 처음 설치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경 연화지 청사를 본부 사무소로 사용하였으나, 중국 국민정부가 1946년 5월경 ..
남경시 한구로 22번지 일본군이 남경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을 전시해 놓은 장소 금릉대학(金陵大學)의 전신은 1888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회문서원(匯文書院)이었다. 1910년 회문서원과 기독(基督)․익지(益智)서원을 통합하여 건립한 굉육서원(宏育書院)이 병합하여 금릉대학을 정식으로 창립하였다. 당시 명칭은 금릉대학당(金陵大學堂)이었고, 1915년 금릉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1952년 남경대학에 합병되었다. 금릉대학은 한국독립운동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부터 한인유학생이 이곳에 입학했고, 이중 다수가 한국독립운동사에 투신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여운형, 선우훈, 서병호, 백남칠, 조동호, 현창운, 김마리아 등이었고, 이들은 대체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