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성 남경시 일본군이 남경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을 전시해 놓은 장소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국민정부(國民政府)의 수도였던 남경을 점령한 뒤 이듬해 2월까지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른 사건을 가리키며, 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 일본에서는 ‘난징사건(南京事件)’이라고 한다. 정확한 피해자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약 6주 동안 일본군에게 2~30만 명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되었으며,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2~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1946년에 도쿄(東京)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규모를 15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하지만 난징대학살 당시 국제적십자사·세계홍만자회(世界..
절강성 항주시 인화로 22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항주에 도착한 직후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투탄의거 직후 일제의 감시와 검거를 피해 상해를 떠나 항주에 도착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로 이전한 후 처음으로 사용한 청사가 청태 제2여사였다. 이곳 32호실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장 김철이 머물고 있었고, 임시 국무위원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인화로 22호로 지번이 바뀌었고, 청태 제2여사 자리에는 군영반점이 자리잡고 있다. 군영반점은 항주시 인민정부상업국 소속인 음식복무공사에 속한 국영여관 겸 음식점이다. 외부 모습은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지만, 안쪽에는 아직도 옛 모습이 남아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곳 청태 제2여사에서 잠시 머물다가 호변촌..
절강성 항주시 상성구 판교로 오복리 이롱 2호 대한민국임시정부 호변촌 청사에 살았던 가족들이 1934년 11월에 오복리 2호 건물로 이주하여 거주했던 곳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상해를 떠나 항주에서 약 3년 6개월여 동안 머물렀다. 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청태 제2여사에 이어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두었다. 일제 측의 정보 문서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이 처음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함께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호변촌 청사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 1934년 11월 오복리 2가 2호로 이전하였다고 나와 있다. 현재는 2층의 목조식 건물로 왕씨 성을 가진 주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건물의 외관은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가족들은 이 곳에서..
절강성 항주시 학사로 32호 근처 한국독립당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따라 항주로 이동하여 사무실로 사용했던 곳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독립운동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3년 말까지는 상해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로 이동함에 따라 1934년 1월 항주로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기관지로 《진광》을 발행하는 한편 ‘항주구회’와 ‘항주특구회’ 등의 지부를 설치하고, 간부진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일제 측 정보 문서상에는 한국독립당의 항주 사무소 주소가 세 군데로 나타나 있다. 학사로 사흠방 34호, 40호, 41호가 그것이다. 2002년 4월 현지 조사 시 확인된 바에 따르면 학사로 사흠방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구지기념관 절강성 항주시 상성구 장생로 55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에서 머물던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투탄의거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가흥을 거쳐 절강으로 들어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항주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군무장 김철이 머물던 청태 제2여사를 청사로 사용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을 청사로 사용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일제측 자료를 통해 1935년 11월까지 사용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항주시 정부는 2002년 호변촌 23호의 청사 건물의 복원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청사 복원을 위해 한국 독립기념..
중국 항주시 서호 1085년 중국 송나라로 구법을 온 고려 의천 스님이 14개월간 머물렀던 사찰 혜인고려사는 1085년 중국 송나라로 구법을 온 고려 의천 스님이 14개월간 머물렀던 사찰로 고려로 돌아간 의천 스님이 『화엄경』과 황금 2천냥을 시주해 중창한 후 사찰이름까지도 고려사로 바뀌었다. 혜인고려사는 5대 오월(吳越) 국왕 전류가 세웠으며, 원래 이름은 혜인선원이었다. 북송시기 고려왕자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구법을 위해 머물렀고, 정원법사와 대론이후 다시 고려에 귀국하여 혜인선원 중창 복원비를 보내 황금으로 절을 증축하였고, 함께 보낸 화엄경을 모심으로써 이름을 교원으로 바꾸었으며 사람들은 그때부터 고려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2007년 5월 1일에 복원된 혜인고려사는 세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
절강성 가흥시 해염현 남북호풍경구 재청별장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가흥에서 활동할 때 김구가 매만가 피난처 이후 사용했던 은신처 재청별장은 남북호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호 풍경구(南北湖風景區)에서 첫 번째로 건립된 근대식 별장이다. 해염현의 명망가인 주병수(朱丙壽)가 1916년 그의 둘째아들의 요양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투탄의거 이후 김구는 일제의 수배를 받게 되었다. 김구는 저보성(褚輔成)의 도움을 받아 상해에서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가흥에 도착한 직후 매만가 76호에서 생활하였으나,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 오자 저보성의 장남 저봉장(楮鳳章)의 처가의 별장인 재청별장으로 옮겼다. 이 별장은 저봉장의 부인 주가예(朱佳蕊)의 숙부가 소유하고 있던 별장이었다. ..
절강성 가흥시 일휘교 17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에서 활동할 때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잠시 피난 생활을 하던 곳 한국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주지는 가흥시 일휘교(日暉橋) 17호에 위치해 있다.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투탄의거 직후 김구는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이동녕ㆍ박찬익ㆍ엄항섭ㆍ김의한 등과 그 가족들도 가흥으로 피신하여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일휘교 17번지는 김구가 피신하여 있던 매만가 76번지와 약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일휘교 17호 건물은 청조 말년에 나무와 벽돌로 만들어졌다. 2층 건물로 네 칸의 방과 마당이 있다. 총 부지 면적은 904㎡이며, 전시 면적은 332.5㎡이다. 1995년 가흥시가 자체적으로 보수 공사를 진행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사진 및 당시 사용했던..
절강성 가흥시 매만가 76호 윤봉길의사 투탄의거 후 일제의 검거를 피해 가흥으로 피신한 김구가 피난처로 이용했던 곳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투탄의거 직후 김구는 미국인 목사 피치의 집에 피신하고 있다가, 저보성(褚輔成)의 도움으로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김구는 가흥으로 피신한 직후 ‘장진구’ 또는 ‘장진’이란 가명을 사용하면서, 저보성의 수양아들 진동생(陳桐生)의 별채인 매만가(梅灣街) 76호에 머물렀다. 김구와 관련된 유적지는 김구가 피난 시기에 머물렀던 건물과 ‘김구피난처 진열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총 부지면적은 1,420㎡이며, 건물 면적은 520㎡, 진열관 면적은 566㎡이다. 건물 입구에는 ‘대한민국 김구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고 쓰여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2층 목조 건..
상해시 황포구 마당로 306롱 3-5호 임시정부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사용했던 마지막 청사 건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수립된 후 만 13년 동안 상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청사를 두고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장소나 청사의 위치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신부로에서 제1회 의정원 회의가 개최된 후 수립되었지만, 이곳이 청사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도 한 두 곳이 아니었다. 여러 곳을 옮겨 다녔는데 현재 확인된 횟수만 해도 열 두 차례 이상이라고 한다. 임정 수립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청사 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등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1919년 1..